화평마을 문화방/책방

[책]아무튼, 메모

화평마을 2020. 3. 31. 16:17

내가 밤에 한 메모, 이것으로 나의 내일이 만들어질 것이다.

 

 

아무튼, 메모

작가 정혜윤

위고 출판사

 



 

아무튼 시리즈는 가볍게 읽기도 좋고 재밌어서 참 좋아하는데요.

[아무튼, 술] 읽으면서는 완전 넘어가도록 웃었고, [아무튼, 문구]를 읽으면서는 같은 문구인이란데 큰 동질감을 느꼈지요.

그런 연장선에서 [아무튼, 메모]는 흥미 있는 주제였기에 금새 책을 펼쳐봅니다.

 

책을 고르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저는 일단 흥미로운 제목에 자주 끌려서 읽어요. 

작가도 참 중요하잖아요. 작가가 누군지 잘 모를때엔 먼저 읽고 작가에 대해 찾아보는 편입니다.

사실.... 전 정혜윤 작가를 몰랐어요. 어떤 분인지.

다 읽고나서 찾아보니 아! 하며 책이 더 잘 이해되는 마법같은 순간을 경험했죠.

정혜윤PD는 CBS 특집 다큐멘터리 [불안], 세월호 참사 2주기 특집 다큐멘터리 [새벽 네 시의 궁전], 재난 참사 유가족들의 이야기 [남겨진 이들의 선물], 그 밖에 [자살률의 비밀], [조선인 전범-75년 동안의 고독], [양희은의 정보시대], [정재환의 행복을 찾습니다], [최보은의 서울에서 평양까지], [김어준의 저공비행],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이상벽의 뉴스매거진 오늘], [행복한 책읽기], [김미화의 여러분] 등 다수의 라디오 다큐멘터리와 다양한 시사교양 프로그램을 제작했더라구요. 

또 책읽기에 관한 책도 진짜 많이 쓰셨던데, 부끄럽게 전 이제야 알았네요.. 

차차 찾아 읽어보기로 합니다.

 

 

사실 산문집을 보면 제목을 보면 어떤 내용일지 좀 짐작하면서 읽게 되잖아요.

아무튼 시리즈를 먼저 읽어본 경험으로 아, 작가가 메모에 관한 에피소드와 메모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겠거니 하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처음부터 당황했어요. 

뭐? 메모를 잘 안한다고?! 아니, 그럼 왜 이 책을 쓰게 된거야?!

하는 의문에서 시작했는데, 너무 글을 잘 쓰시는 거예요. 

메모를 잘 하지 않던 작가가 메모를 어느날 하게 되었던 순간, 그리고 자신이 한 메모와 관련된 이야기, 메모의 의미까지. 

읽을수록 반하게 되었어요.

 

메모가 가진 의미에 대해 이야기한 구절이 참 와닿았습니다.

 


“메모같이 사소한 일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이렇게 되묻고 싶다. 

우리는 항상 사소한 것들의 도움 및 방해를 받고 있지 않냐고. 

강아지가 꼬리만 흔들어도 웃을 수 있지 않냐고, 미세먼지만 심해도 우울하지 않냐고, 

소음만 심해도 떠나고 싶지 않냐고. 

그리고 또 말하고 싶다. 

몇 문장을 옮겨 적고 큰 소리로 외우는 것은 전혀 사소한 일이 아니라고. 

‘사소한 일’이란 말을 언젠가는 ‘자그마한 기적’이라고 부르고 싶어질 것이라고. 


크으. 사소한 일이란 말을 언젠간 자그마한 기적이라고 부른다는 구절이 이렇게 멋있을 수 있나요.

 

메모를 하게 된 계기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어요. 

 


나는 르포 작가가 되고 싶었다. 

가뜩이나 나도 혼란스러운데 다른 사람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듣고 싶었던 이유를 그때는 몰랐다. 

몇 년 전에야 그 감정의 정체를 알았다. 

나는 ‘인간을 위로하고 기쁨을 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 일에 기쁨을 느꼈다. 

그 일을 할 때 보람을 느꼈다. 

슬픈 세상의 기쁜 인간이 되고 싶었다. 

내가 없으면 볼 수 없는 현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현실의 또 다른 측면에 불을 비추고 싶었다.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 나로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일이었다. 

나 자신이 현실을 보는 새로운 눈이 없었다. 

내 눈 두 개는 세태에 영합하면서도 아닌 척할 줄 아는 나의 영리하고 쩨쩨한 자아에 깊숙이 물들어 있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메모의 화신’이 되었다. 나 자신을 위한 메모를 했다. 

문구점에 가서 가장 두꺼운 노트를 몇 권 샀다. 거기에 책을 읽고 좋은 문장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나에게 도움이 될 생각들을 꿀벌이 꿀을 모으듯 모았다. 


이때 생각했던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그러기 위해 메모를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작가가 걸어온 발걸음이 이때의 생각을 꾸준히 실천해오고 있었다는데에 소름 돋을 정도로 감동했어요. 작가의 소신이 어떤지 짐작할 수 있었달까요.

 

 

책의 전반부가 메모에 관한 작가의 생각과 메모를 하게 된 과정 등에 관한 이야기라면 

책의 후반부는 작가의 메모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옵니다.

 

첫번째 주제는 꿈.

세월호 유족에게 받은 달력과 생명다양성재단에서 만든 달력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꿈"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꿈과 관련된 작가의 생각을 쭉 읽으면서 가장 인상깊었던건 이 대목이었어요.

 


이 아이들이 살아 있었다면 꿈을 이룰 만한 세상이었는가?

살아 돌아온다면 "이제는 네 꿈을 펼쳐라!"라고 할 만한 세상인가?


 

두번째 주제는 몸.

작가는 비건이었는데, 이와 관련된 자신의 생각을 인터뷰한 내용과 서울대공원의 장애 콘도르 '꼽추'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나는 내가 보는 것들, 그 모습 그대로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맹금류관의 독수리 그리고 장애가 아닌 또 다른 콘도르들을 봤고 

하늘을 봤고 바람소리를 들었다. 

바람이 이렇게 말해주었다. 

‘순간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니까.’

 커다란 나무가 내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세상엔 슬픔이 많아. 기쁨을 소홀히 하지 말라니까.’ 

나는 그 충고를 일생에 걸쳐 셀 수 없이 많이 잊고 살았다. 


장애가 있었던 콘도르의 죽음을 취재하는 일화가 있었는데, 문득 동물원의 많은 동물들이 생각났어요.

콘도로 '꼽추'는 언젠가 하늘을 날아본 적이 있었을까. 

인간과 동물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어요.

 

세번째 주제는 조선인 포로 감시원.

조선인 포로 감시원에 관한 이야기는 부산에 있는 '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서 처음 알았어요.

일제강점기, 수없이 데려간 조선인들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들어서 알 고 있었는데, 조선인 포로 감시원에 관한 이야기는 처음 듣고 정말 충격받았었어요. 

호주의 '콰이강의 다리'에서 강제노역인을 감시한 조선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조선인 포로 감시원은 전범이 되어 사형을 선고받거나 감옥에 가게 되었는데요.

살아남은 한분, 이학래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진짜 악독하다고 일제를 욕하면서 서글픈 시대를 살아온 많은 조선인들을 떠올립니다.

 

 

그래서 작가는 메모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해요.

 

 


혼자서 메모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우리는 사회적 존재다. 

메모는 재료다. 메모는 준비다. 삶을 위한 예열 과정이다. 

언젠가는 그중 가장 좋은 것은 삶으로 부화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메모할지 아무도 막지 못한다는 점이다. 

분명한 것은 메모장 안에서 우리는 더 용감해져도 된다는 점이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더 꿈꿔도 좋다.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쓴 것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어떻게 살지 몰라도 쓴 대로 살 수는 있다. 

할 수 있는 한 자신 안에 있는 최선의 것을 따라 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있지 않은가. 

자신 안에 괜찮은 것이 없다면 외부 세계에서 모셔 오면 된다. 


우리는 아직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른다. 

우리의 가능성을 알지도 못하고 바스러진다. 

그러나 세상에 있는 수많은 것들이 우리의 손길을 기다린다. 

수많은 것들이 우리의 스러짐을 슬퍼한다. 

수많은 것들이 우리가 해낼 수도 있었을 일을 아숴워한다. 


 

책을 덮으며 나 개인을 위한 메모 뿐 아니라 우리 사회를 위한 관심어린 메모가 필요하겠단 생각이 듭니다.

 

 

참 멋있는 작가님을 알게 되어 기쁜 날이네요.

 

 

 

 

2020년 3월 31일 쓰다.